조용히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의 소중함 (누가복음 10장 38-42절)
2025년 9월 7일 주간목장교안
1.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오셨을 때 일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게 일을 했지만 마리아는 그 시간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아주 불편할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서 결국 마르다는 서운하다 못해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데 말씀하셔서 도우라 하소서”라고. 하지만 뜻 밖에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날 대접하려고 너무 많이 마음 쓰는데, 참 고맙다. 하지만 너무 많은 애는 쓰지 마라. 마리아는 이게 좋아 이걸 선택했으니 그것을 빼앗기려 하지 않을 거다”라고. 언뜻 보면 이 말은 잘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어쩌면 마르다에게 참 힘든 하루였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그 말씀은 정말 마르다에게 서운할 그런 말씀일까요? 그 말씀은 정말로 <일>과 <말씀듣기>를 나누어, 말씀은 중요하고 봉사의 일은 덜 중요하다는 그런 말씀일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럴 수 없는 것은 주님은 바로 그 앞에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핵심은 율법을 잘 아는 율법사에게 율법을 지식으로 잘 요약하지만 말고 그 율법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잘 요약해 놓고도, 그것을 알지만 말고 살아내라고 말씀하시자,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사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만큼 진실하게 그것을 알기 원한다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아주 교묘하게 위선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끝없이 질문함으로써 진지한 듯 위선하면서 실천을 교묘하게 미룰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해 정곡을 찌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주님은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비유의 핵심은 “네 질문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너의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남에게 이웃 되어주려는 사람과 이웃 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웃과 이웃 아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처지와 아픔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함께 하는 사람과 이웃의 처지와 아픔에 냉담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킵니다. 종교적이지만 그 말씀을 실천함은 없는 사람의 대표로 말입니다.
질문)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요?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이웃되어 주는 사람인가요? 당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 준 적은 언제였습니까?
2. 비유 속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감동적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신음 소리를 듣자,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가 안심시키고 성의를 다해 소독하며, 기름 바르고 싸매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짐승에 태워 데리고 가서 돌보는 그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의 손과 발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을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비유를 마치면서 그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감동을 받고 그것을 계기로 삼아 여러 가지 일을 하려 할 것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어떤 점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당혹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의 얘기는 조금 전에 보았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주제와 반대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선한 실천을 한 사람 마르다, 부엌에서 열심히 일한 마르다는 무안을 당한 것 같고, 방 안에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마리아는 도리어 칭찬을 받은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이런 순서로 이어지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실천은 너무나 필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선한 실천을 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의 심장부에는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바라보며 그 분을 묵상하며 그 분으로부터 듣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돌보는 삶은 너무나 필요하고 정당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천은 단순히 그 일의 필요성이나 정당성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선한 일에 생명과 피를 공급하는 심장부가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기뻐하는 가운데 머물러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집중하며 그분께 마음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 주님을 기뻐하며 머무는 시간 없이 그냥 자신의 생각에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열심히 해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선한 일들이 나중에는 인간적인 문제점만 드러내고 맙니까? 그것을 위해 우리는 늘 실천에 앞서, 또 실천의 중간에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묵상하면 주님께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질문) 당신은 이 말을 이해했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신앙생활에는 생명과 피를 공급하는 심장부가 있습니까? 주님을 묵상함이 없는 실천, 특별히 수많은 선한 일들로 이루어진 분주한 삶이 잘못될 가능성에 대해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요?
3. 그러나 오해하지는 맙시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봉사가 말씀듣는 것보다 열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만 떼놓고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본문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로 다음에 위치해 있다는 이 맥락을 이해한다면 그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님 앞에 나아가 거기 머물며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집중하며 마음을 열어드리는 것을 신앙생활의 심장부라고 표현한 것을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심장이 무엇입니까? 심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심장은 보이지 않아 팔, 다리처럼 그 활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자만 그러나 그 활동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실 눈에 보이는 모든 신체의 활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나아가 그 앞에 머무는 그 분은 누구입니까? 그 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의 실행자이시며 대속의 피를 흘리사 우리의 구주가 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 앞에 나아가 조용히 머무는 시간, 그로 인해 이 땅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와 에너지를 얻는 그 시간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위대한 분 앞에 나아가 조용히 그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의 질서가 바로 잡히고, 쓸데없이 과장되었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유혹하는 것들 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인기 속에서 길을 잃습니까? 하지만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인기가 있으셨지만 인기를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인기 앞에서 불안해하며 잠 못 드는 일부 연예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요. 그 주님이 평소 힘쓰신 것은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때에도 새벽 미명과 저녁에 아버지와 독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영광을 보며 그 앞에 머문다면, 그 영광의 빛 앞에 이 세상의 영광스런 것들은 다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 앞에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명료해질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로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 뿐입니다. 남을 돕기 원하지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 당신에게는 조용히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지성소(시간이나 장소)가 있으십니까? 요즘 당신은 무슨 일로 그렇게 분주하십니까? 그리고 그 일이 지성소로 나아가지 못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까? 함께 나눠봅시다.
4. 당신은 이번 설교를 통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리고 이 결심 앞에 당신이 결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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