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서 깨달은 것 (시편 73:1-3, 16-26절)
2025년 8월 31일 주간목장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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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시편의 저자는 신앙생활 잘하다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깊이 깨달아 알고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참으로 선을 행하시는 게 사실”이지만 그는 신앙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그가 흔들린 것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안 믿는 사람도 잘만 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벌받거나 잘 안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편하게 사는 겁니다. 어려움이 없다 보니 얼마나 거만하고 교만한지 아무나 보고 반말입니다. 그런데도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는 잘 믿으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지지리도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거나 해도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데, 나는 성도로서 해서는 안 될 사업은 안 했는데 생활은 늘 쪼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자신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질투하였다고 ... 그는 악인의 삶을 보면서 의로운 분노를 느꼈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질투를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인간으로서 어찌 저런 짓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냐”고 분개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차 타고 다니는 게 부러웠다고 고백한 겁니다. 그래서 유혹을 느낀 겁니다. “뭐야 교회 열심히 다녀도 소용없잖아! 나도 한번 눈을 딱 감아 버릴까?” 그래서 저자는 2절에서 넘어질 뻔, 미끄러질 뻔했다고 합니다.
질문) 당신은 그런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시험에 빠진 적이 없습니까? 실제 상황에서 당신은 당신에게 별 믿음이 없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까? 언제입니까?
2. 그렇다면 이 경건한 구약 성도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극복했을까요?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문제가 그에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의 수준이 유치원생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가 하는 일을 늘 사랑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도 우리에게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닌 데도 우리는 그것을 단지 당장의 성공과 실패, 번영과 궁핍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어려운 겁니다. 그런데 이 시편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말 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고민 끝에 그것을 가지고 성소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올바른 결정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의문과 질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문제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눈과 지각을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어려움을 만나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분깃점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의 선택은 사활을 가르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질문)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신앙생활 중에 하나님에 관해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했습니까? 성소로 올라갔던가요? 아니면 신앙생활을 떠나지는 않았나요? 당신의 경험을 얘기해 보세요.
3. 그렇다면 성소에 올라가면 성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성소에 올라가면 여러 가지 많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그는 비록 아직 자기 이야기를 내놓을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그들을 보면서 자신만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자신보다 더한 상황을 겪었던 사람도 만납니다. 나만 겪는다고 생각하고, 내 상황이 제일 억울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한 상황을 겪고도 믿음으로 이겨낸 성도들이 있음을 보는 것은 큰 (그러나 사실은 얄팍한) 위안과 용기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위로와 조언을 얻습니다. 사실 교회공동체는 오랫동안 그들이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받은 지혜와 위로가 가득한 보고(寶庫)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위로도 하시지만, 위로받은 성도들을 통해 위로를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환난 가운데 받은 그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고후1:4). 하지만 성소에 올라가는 것은 그 이상의 유익을 가져옵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날따라 말씀이 자신을 위한 말씀인 겁니다. 자신이 의문을 품었던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떤 것인지, 그 선하심이 각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선하실 수 있는지를 듣는데 그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아시고 이런 말씀을 준비시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옛 성도의 고백에 '아멘' 하게 됩니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 . . 나를 아시나이다 . . .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 . . 행위를 . . .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성전에 올라가면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내 마음이 한순간에 달라져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혼자서라도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예배는 그렇게 놀랍습니다. 예배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종교적 행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각 성도를 심방하시는 시간입니다. 공동체 위에 풍성한 은혜를 부으시고, 성도들은 각자 자기 분량대로 은혜를 담아갑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너무 쉽게 “저 좀 쉴게요! 다음에 예배드리고 싶을 때 다시 올게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저절로 올까? 혼자서 그렇게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사탄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그 중 더러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맙니까?
질문)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한 후 신앙생활을 쉰 날이 얼마나 되는가? 돌아오기 쉬웠나? 그 기간이 보람되고 신앙 발전이 있었나?
4. 감사하게도 시편 저자는 성소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는 거기서 영원한 관점에 관해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당장의 부유함과 편리함의 관점이 아닌 영원과 궁극의 관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관점이 생기니, 모든 것이 달라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물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소에 올라갈 때 무엇을 기대하나요? 위로받는 느낌인가요? 아니면 깨달음인가요?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진짜 해결됩니다. 그래야 집에 돌아가서도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가면 모든 게 다시 도로묵이 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깨달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느낌”, 위로받는 “느낌”을 더 선호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좋은 시설, 음향, 음악, 조명과 감정을 자극하는 (그래서 길 필요가 없는) 설교를 통해 위로받는 느낌을 주려고 애를 씁니다. 성도들도 그런 간편한 페스트푸드(간편식품)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집에 돌아갔을 때도 그 “느낌”이 당신을 잡아 줄 수 있을까요? 조명과 음악과 분위기가 꺼진 후에도 당신의 그 느낌은 그대로 유지될까요? 왜 깨달음이어야 하나요? 그 이유는 깨달음은 그 모든 것이 꺼진 후에도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일종의 눈이 열리는 경험이어서, 어떤 깨달음은 이후 평생 지속되며 인생을 이끄는 강렬한 변화입니다.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상에 대한 자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명이 꺼져도 깨달음은 지속됩니다.
질문) 이 말을 당신은 이해했나요? 공감하나요? 당신의 태도가 잘못된 것은 무엇이었나요? 당신은 진리에 대해 관심이 있나요? 아니면 느낌을 추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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