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의 공동체 1 (마태복음 5장 13-16절)
2025년 6월 29일 주간목장교안
1.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팔복의 말씀을 살펴보았다. 이번 주에는 팔복에 이어지는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마 5~7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선언’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니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말씀이다.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사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팔복을 시작할 때 말했던 것처럼 말씀에 대한 반응은 여러 가지다. 산상수훈에 반응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말씀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말씀에 대해서는 모르고 순진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은 아무나 듣고 실천하라고 주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너희’와 ‘세상’을 구분하셨다. 이 말씀은 ‘아무나’가 아니라, ‘너희’로 구별된 제자들이 듣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두 번째 부류는 말씀의 수준이 너무 높고 이상적이어서 실천하기에는 비현실적이라고 하여, 실천은 불가능하지만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실천해야 할 높은 수준의 목표로 주신 말씀이 아니다. 이미 ‘착한 행실’이 있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세 번째 부류는 구원을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말씀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실제로 말씀을 다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원을 얻기 위한 사람에게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주신 말씀이 아니다. 이미 구원 얻은 자에게 이렇게 살라고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 실천하며 살라고 주신 말씀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대로 살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오늘이나 내일 실천하기 위해 삶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을 닮아가며 바라보며 평생 추구해야 할 삶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은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야 할 목표다.
질문) 산상수훈에 나타난 세 가지 반응은 모두 잘못된 반응이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으며 어떻게 반응했는가? 혹시 세 부류 중에 하나와 같이 반응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평생 추구해야 할 것으로 반응했는가?
2.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도 익히 잘 아는 말씀이다. 너무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이 산상수훈에 들어 있는지, 팔복 뒤에 위치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말씀은 팔복에 이어서 주어진 말씀이다. 팔복 뒤에 있어서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다. 팔복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복에 대한 내용이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받는 복이다. 이미 복 가운데 있으면서 또 다른 복을 마주하는 끝없는 복의 순환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받는 복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희’이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회개하여 심령이 가난하게 되고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 더 나아가 자신의 죄와 죄의 결과, 그리고 세상의 죄와 그 결과를 보고 애통하며 빚어져 겸손으로 온유하게 됨을 경험한 사람들. 사람들의 말로 분노하기보다 주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 이미 긍휼히 여김 받았음을 알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 더 큰 긍휼을 경험해가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 자신의 허물도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긍휼히 여기며 화평하게 하는 ‘Peace Maker’가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렇게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도 복인데, 또 다른 복을 예약하며 여덟 가지 복의 순환 고리 안에서 살아간다.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은 이렇게 끝없는 복의 순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질문) 팔복의 끝없는 복의 순환 안에서 이미 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가?
3. 주님은 왜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세상에 미칠 영향력을 염두해두고 하신 말씀이다. 소금은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부패를 막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맛을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부패하고 고통스러운 세상 가운데 세상이 더욱 부패하고 더욱 고통스러운 곳이 되지 않도록 소금과 같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 힘이 있는 자들에게만 살 만한 세상에서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게도 살 만한 세상이 되도록 소금과 같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빛의 기능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다. 어둠 속에 숨은 것을 드러나게 하고 사물을 바르게 보게 한다. 그리스도인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어 보게 하시려고 빛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은 세상적으로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헤롯 왕실의 사람들도 아니었고, 존경받는 바리새인도 아니고, 성전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갈릴리 어촌의 무명의 어부이거나 세리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이들은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처럼 영향력을 나타내며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 봤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숫자도 너무 적었을 것이고, ‘빛과 소금’처럼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둠에 맞서 빛으로 비추기에도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무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은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은 사회적 위치나 학벌이나 재산의 규모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주길 원하셨던 것이다. 소금은 특유의 짠맛이 있고, 빛은 특유의 광채가 있다. 소금의 짠맛과 빛의 광채는 이미 구원받은 자의 내면 안에서 깊이 일어난 팔복의 복된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팔복의 변화가 깊어지고 깊어짐에 따라 맛이 더해지고 광채는 더해진다. 맛과 광채는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내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다. 팔복의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를 따라 빚어진 성품을 가지게 된 자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그 나라의 영광을 확신하며 세상의 핍박까지도 감당하고자 할 때, 맛을 내고 광채를 비추는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다면, 이미 맛을 잃은 소금, 그저 하얀 가루일 뿐인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조건은 소금과 빛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배우지 못하고 재산이 없고 사회적 위치가 낮더라도 깊이 변화된 성품만으로 세상에 감동을 주고 한 공동체를 살맛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의 빚만 지다가 돌아갈 수 있다. 소금의 맛과 빛의 광채는 지식이나 지위나 재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러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 나에게 팔복의 여정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빚어진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가? 세상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소금의 맛을 내고 빛의 광채를 낸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4. 세상적 탁월함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를 향해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은혜로 빚어진 내면적 남다름으로 시작된 공동체로서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내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건물과 시설, 프로그램이나 학벌과 학위로 승부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건물을 새롭게 지을 필요가 있고, 열심히 양육하려면 프로그램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진실에 눈을 감고 건물과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부흥이라고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 수적 증가로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시설과 여건으로 인한 종교적 소비자들의 증가를 부흥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깨어 염려해야 한다. 도대체 보잘것없은 존재가 어떻게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낸단 말인가? 자신을 내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하고 가난함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림으로 가능한 것인가? 힘을 가지고 기회에 재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하여 긍휼함으로 가득한 사람이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낸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을 힘으로 억압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노련하게 조직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주님은 빛이 자신을 태우며 빛을 내고, 소금이 자신을 녹임으로 맛을 내듯이 그렇게 영향력을 나타낼 때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도 어둡다. 그렇다고 빛이 어둠이 너무 어둡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다. 빛이 세상이 어둡다고 빛을 비추기 어렵다고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나눔) 우리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나타내려고 하는 일들이 때로 말씀에 근거하지 않다는 것에 주의하자. 우리는 자신을 태워 빛을 내고 자신을 녹여 맛을 내는 모습으로 세상 속에 복음의 영향력을 드러내야 한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에 근거해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지 나누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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